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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 대성당이 자리하고 있는 명동 일대는 옛날 조선 ‘한성부 남부 명례동(明禮洞)’에 속하던 지역입니다. 지금은 주위 고층빌딩 때문에 잘 보이지 않지만 ‘북달재’라고 불리던 남산 북녘 언덕 위에 세워진 명동 대성당은 도성 내 어느 곳에서나 올려다 보이던, 뾰족탑이 인상적인 서양식 교회 건물로 세인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이 개항정책을 취하게 되면서 교회에 대한 정부의 박해정책에 변화의 조짐이 보이자, 교회 당국은 1882년 4월에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본당으로 종현 본당, 지금의 명동 본당을 설정했습니다. 이후 1882년 7월 26일에 부주교로 임명된 블랑 신부가 신병으로 프랑스 본국으로 돌아가 요양 중이던 리델 주교가 1884년에 선종하면서 조선대목구 제7대 교구장직을 승계하였습니다. 1890년 블랑 주교가 사망한 후 제8대 교구장 주교로 착좌한 뮈텔 주교는 1892년 조선 최초의 서양식 대성당 건축을 착공하게 되었습니다. 공사를 시작하였지만 성당을 짓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공사 현장의 중국인 기능공들이 본국으로 철수하는 바람에 1년 이상이나 공사를 중지할 수밖에 없었고 전쟁 종결 후 공사를 재개하였으나 준공을 앞두고 공사를 감독하던 코스트 신부가 선종하는 등 크고 작은 문제들이 연거푸 발생하였지만 푸아넬 신부가 대신 마지막 공사를 서둘러 1898년 5월 29일에 대성당 축성식을 거행할 수 있었습니다. 명동 대성당의 지하 소성당 묘역은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시기 위해 설계 때부터 계획된 시설로서, 시복 수속 작업의 일환으로 각지에서 발굴된 순교자들의 유해가 1900년부터 이곳으로 옮겨져 안치되었습니다. 현재 명동 지하 성당에는 순교 성인 다섯 분과 순교자 네 분 등 모두 아홉 분의 유해가 모셔져 있습니다. 성 앵베르 주교, 성 모방 신부, 성 샤스탕 신부,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 김성우 안토니오, 순교자 이 에메렌시아, 무명 순교자 1명, 푸르티에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가 모셔져 있어, 기도와 참배를 위해 찾는 순례자들이 많은 성역입니다. 이 가운데 이 에메렌시아는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시복 대상자로 선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