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조 터

뒤로

주요정보

소리로 듣기 형조는 조선시대의 중앙관서인 육조의 하나입니다. ‘추관’ 또는 ‘추조’라고도 했으며, 사헌부·한성부와 아울러 삼법사라 일컬어지기도 했습니다. 형조는 한성부 서부 적선방에 있었는데,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이후, 많은 천주교인들이 형조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았습니다. 그 시작은 정조가 즉위한 지 9년째 되던 1785년에 발생한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신자들이 명례방에 있던 김범우 토마스의 집에서 집회를 갖던 중, 형조의 금리들에게 발각되어 형조로 압송된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최필공 토마스, 최필제 베드로, 윤운혜 루치아, 정철상 가롤로 등이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고, 김천애 안드레아,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윤지헌 프란치스코 등은 전주에서 서울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았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 때의 성인 증거자들은 대부분 포도청과 형조를 거쳐갔습니다. 기해박해 당시 이광헌 아우구스티노, 남명혁 다미아노, 김효임 골롬바, 김효주 아네스,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 등이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으며, 1866년 병인박해 때에도 전장운 요한, 최형 베드로 성인 등도 형조를 거쳐 갔습니다.
형조 터 표시는 5호선 광화문역 세종문화회관에서 세종로공원 정문 쪽 도로 바닥에 매입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