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감영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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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정보

소리로 듣기 경기감영이 설치된 것은 태종 때의 일이었다. 한양으로 천도한 다음 해인 1395년(태조 4)에 경기 행정편제가 개편되었다. 이때 광주와 수원의 관할인 군현을 갈라서 경기좌도라 하고, 양주·부평·철원·연안의 관할인 군현을 경기 우도로 했습니다. 그 후 1413년에 경기 영역을 다시 한 번 조정하여 좌·우도로 나누지 않고 경기로 확정하면서 도관찰사를 파견하였고, 감영을 수원에 설치하였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뒤에 감영은 경기도 광주로 옮겨졌다가 다시 한성부 내 서대문 밖 반송방으로 이전되었습니다.
숨어서 천주를 믿어야 했던 박해기였지만 점차 확산되어 가던 경기 지역의 신앙 공동체는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최창주 마르첼리노, 이중배 마르티노, 원경도 요한, 권상문 세바스티아노, 홍인 레오 등 체포된 신자들은 경기감영으로 이송되어 혹독한 형벌과 문초를 받았습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순교한 이가 있었는데, 바로 순교자 조용삼입니다. 조용삼은 11개월 동안 옥에 갇혀 있었고, 옥중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대세를 받았습니다. 1801년 2월에 다시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가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형벌을 받았으나 약해진 몸은 더 이상의 형벌을 감당할 수 없었고, 결국에는 다시 옥에 갇힌 지 며칠 만인 3월 27일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형벌 때에 박해자들을 향해 이렇게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하늘에는 두 명의 주인이 없고, 사람에게는 두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천주를 위해 한 번 죽는 것뿐이며, 다른 말씀은 드릴 것이 없습니다.” 경기감영 터 표지석은 종로구 평동 164 서울적십자병원 정문 옆에 서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