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신학교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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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정보

소리로 듣기 용산의 예수 성심신학교 성당은 1887년 3월 부엉골 신학교가 용산으로 옮겨 개교한 이후인 1902년 4월 14일에 성당 봉헌식을 가졌습니다. 당시 조선 대목구장 뮈텔 주교는 신학교 부속 성당 건립을 위해 국내외에서 후원자를 구하던 중 프랑스인 드 사라(de Sarah) 여사로부터 기부하겠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성당 건립 기금 후원에 앞서 한국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순교지에 성당을 건립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웠습니다. 이에 뮈텔 주교는 김 신부의 순교지인 새남터는 홍수로 자주 잠기는 위치에 있어 위험하고, 오히려 조선대목구에서 유일한 신학교인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 순교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는 점, 그리고 김대건 신부의 뒤를 계승하고자 하는 조선의 신학생들이 공부하는 곳에 신학교 성당을 건립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점을 오랜 기간 설득하여 마침내 그녀의 동의를 얻어냈습니다. 그리하여 1899년 6월 9일에 성당 기공식을 가졌고 3년 동안의 공사 기간을 거쳐 신학교 성당인 “성모 성심 성당”을 완공하였습니다.
한편 뮈텔 주교는 후원자의 뜻을 기리기 위해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미리내에서 이장하여 모시기로 결정하였고, 1901년 5월 21일에 시복 재판 판사인 프와넬) 신부와 기록 서기인 드망즈 신부, 안성 본당의 공베르 신부와 미리내 본당의 강도영 신부, 그리고 신자 30여 명이 참관한 가운데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발굴하였습니다. 발굴된 유해는 강도영 신부 사제관에 안치하였다가 5월 23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겨 안치하였으며, 성당이 완공된 이후인 1902년 6월 23일에 성당 내 제의방에서 제대로 들어서는 오른 편 모퉁이 바닥을 파고 그 안에 유해를 안치하였습니다. 이때 순교자임을 상징하는 ‘빨마가지와 1821~1846 A.K’라고 새긴 대리석 판을 덮어 봉인하였습니다. 한편 성당 출입구 상부에는 나무로 만든 명문을 부착하였는데 거기에는 성당 착공일인 1869년 6월 9일과 성당 봉헌일인 1902년 4월 14일, 그리고 김대건 신부의 세례명 안드레아(Andrea)의 이니셜인 ‘A’, 성 김(Kim)의 이니셜인 ‘K’와 생몰연대(1821~1846)가 로마자로 새겨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