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산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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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정보

소리로 듣기 삼성산 성지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 앵베르 주교를 비롯하여 성 모방 신부와 성 샤스탕 신부의 유해가 1901년 명동 대성당 지하 소성당 묘역으로 모셔질 때까지 묻혀 있던 곳입니다.
본래부터 삼성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이곳은 세 분의 순교성인의 유해가 발굴되면서 알려지게 되었으며, 1970년 사적지로 조성되었으니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닌 듯합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고 세 명의 외국인 사제는 새남터에서 희광이의 칼끝에 죽음을 맞이했고 이들의 시체는 사흘 동안 버려져 있다가 한강변 모래톱에 묻혔습니다. 신자들은 이들 유해를 거두고자 여러 차례 애를 썼고 마침내 박 바오로 등 여러 명의 교우들이 감시의 눈을 피해 죽음을 무릅쓰고 시신을 수습해 노고산에 임시로 매장했습니다. 그리고 4년 후 박 바오로 등이 가문의 선산인 관악산 줄기 삼성산으로 이장했습니다. 박 바오로는 이 사실을 아들인 박순집에게 알려 주고 그 자신도 일가들과 함께 병인박해 때 순교했습니다.
1886년경에 시복 판사를 맡았던 푸아넬 신부가 이 무덤을 확인하였고 1901년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가 지켜보는 가운데 유해가 발굴되어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겨졌으며, 같은 해 11월 다시 명동 지하 소성당 묘역으로 옮겨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