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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단 도보 성지순례
가회동 성당
위치
종로구 가회동 30-3 (02-763-1570)

소개
최초의 미사 터인 ‘계동 최인길의 집 터’ 관할 성당

기억해야 할 인물
‘하느님의 종’ 주문모 신부·최인길

묵상과 기도
성체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와 항상, 기쁘게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기도로 청합시다.

계동은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선교사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 땅에서 첫 미사를 집전한 지역으로, 천주교회 창설 초기, 조선 신자들은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에게 성직자의 파견을 요청했고, 구베아 주교는 주문모 신부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하였습니다. 주 신부는 조선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1794년 12월 24일에 조선에 입국하였습니다.
한양에 도착한 주문모 신부는 계동에 있는 최인길 마티아의 집에 머물렀는데 주 신부는 여기서 한글을 배웠으며, 1795년 예수부활대축일에는 신자들과 함께 조선에서의 첫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주문모 신부의 입국 사실이 탄로 났고, 주 신부는 여회장 강완숙 골롬바의 집으로 피신해야만 했습니다. 반면에 주 신부의 입국과 활동에 도움을 준 최인길은 윤유일 바오로, 지황 사바와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혹독한 형벌을 받은 후 1795년 6월 28일에 순교하였습니다.
현재 이 지역은 가회동 본당 관할 구역인데, 1955년 8월 9일에 병인박해를 일으킨 흥선대원군의 손자이자, 고종의 둘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이 가회동 본당 박성춘 레오 신부로부터 안국동 별궁에서 ‘비오’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았으며, 같은 해 8월 14일에는 의친왕비 김숙도 ‘마리아’라는 본명으로 세례성사를 받았습니다.

의금부 터
위치
종로구 공평동 종각역 1번 출구 SC제일은행 앞 화단

소개
주교와 신부, 평신도 지도자들이 국문을 받던 곳

기억해야 할 인물
성 조신철, 성 남이관, 성 김제준, 성 유진길

묵상과 기도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친 신앙의 선조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의금부는 조선시대 왕명을 받들어 죄인을 추국하는 일을 맡아 보던 관청이었으며 금부·금오·왕부라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박해시기, 천주교 신자들은 서울의 좌․우포도청과 지방의 각 진영) 및 군․현에서 문초를 받았습니다.
그들 가운데 중죄인, 즉 주교와 신부, 평신도 지도자들은 국왕의 특별한 명령에 의해 의금부로 압송되어 국문을 받았습니다.
박해 당시, 의금부에서 국문을 받았던 천주교 신자들은 이승훈 베드로,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 황사영 알렉시오, 조동섬 유스티노 등이었습니다.
현재 의금부 터 표지석은 종로구 공평동 종각역 1호선 1번 출구 SC제일은행 앞 화단에 있습니다.


※ 자세한 성지 내용 보기
전옥서 터
위치
종로구 종로1가 종각역 6번 출구 도로 쪽 화단

소개
형이 집행되기 전까지 수감되어 있던 곳

기억해야 할 인물
성 김제준, 성 전장운, 성 최형, 성 이호영

묵상과 기도
말이 아니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영신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기도로 청합시다.

전옥서는 감옥과 죄인에 관한 사무를 관장했던 관서였습니다. 전옥서에 수감되는 죄수의 대부분은 상민이었지만 때에 따라 의금부나 육조, 왕실의 계보를 편찬하고 왕족의 허물을 살피던 관아였던 종부시, 사헌부 등의 죄인인 왕족이나 양반, 관리들도 수감되었습니다.
전옥서의 옥사는 남자 옥사와 여자 옥사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남옥과 여옥은 각각 담장이 둘러져 있고 각 담장에 출입문이 있었습니다. 또 죄의 크고 작음에 따라 분리 수용하도록 하였습니다.
박해시기 많은 천주교인들이 형조로 이송되어 심문을 받고, 형이 집행되기 전까지 전옥서에 수감되었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유관검 등이 형조에서 의금부로 이송되었다가 전주에서 참수되었고, 강완숙 골롬바, 최필제 베드로, 김현우 마태오 등은 형조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서소문에서 순교하였습니다.
기해박해 때에는 남명혁 다미아노 성인과 정정혜 엘리사벳 성녀가 형조에서 심문을 받은 후 참수되었고,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인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은 의금부에서 형조로 이송되어 처형될 때까지 전옥서에 수감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호영 베드로 성인은 4개월 동안 전옥서에 갇혀 있다가 옥사하였습니다. 병인박해 때에도 많은 순교자들이 전옥서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전장운 요한 성인과 최형 베드로 성인 등은 의금부에서 신문을 받은 후 형조로 이송되어 사형 판결을 받고 서소문밖에서 참수되었습니다. 전옥서 터 표지석은 지하철 1호선 종각역 6번 출구 도로 쪽 화단에 있습니다.
우포도청 터
위치
종로구 세종로 동아일보 신사옥 앞 화단

소개
박해 시기 신앙 선조들의 순교지

기억해야 할 인물
이병교·김덕빈·이용헌

묵상과 기도
교회공동체를 위하여 진심으로 봉사할 수 있도록 기도로 청합시다.

포도청은 종2품 무반인 포도대장, 종6품 무반인 종사관 그리고 포교와 포졸 등을 합하여 모두 235명의 구성원을 가진 기관으로, 그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원래 도적을 잡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 ․ 운영되었습니다. 1878년에 전교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던 리델 주교의《옥중기》에 의하면 우포청은 죄인을 심문하여 죄를 말하게 하고, 좌포청은 이에 대해 판결을 내린다고 하였지만 실제로는 좌 ․ 우포도청의 업무의 한계가 명확하게 분절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음을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포도청은 서린방 혜정교 남쪽에 설치되었으며, 우포도청이 담당한 구역은 서울의 서부 ․ 북부와 경기 우도 즉 가평, 개성, 고양, 연천, 적성, 파주, 포천 등지였습니다.
특히 우포도청은 한국 천주교회의 마지막 순교자들을 탄생시킨 장소입니다. 1879년 5월 14일에 충청도 공주 지방에서 드게트 신부가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이날 새벽 갑자기 들이닥친 포졸들은 드게트 신부뿐만 아니라 함께 거주하던 신자들까지 잡아서 공주 감영에 수감하였다가 5월 29일 서울 포도청으로 이송하였습니다. 이때는 공식적인 박해가 종료되었던 시기라 가혹한 고문이 자행되지는 않았지만, 드게트 신부와 함께 투옥된 신자들은 굶주림으로 큰 고통을 받았습니다. 결국 그 가운데 이병교 레오, 김덕빈 바오로, 이용헌 이시도로 등은 우포도청에서 아사로 순교하였으며 이들이 바로 한국 천주교회의 마지막 순교자들입니다. 우포도청 터 표지석은 현재 종로 1가 89번지 일민미술관과 동아일보 신사옥 앞 화단에 있습니다.

※ 자세한 성지 내용 보기
형조 터
위치
종로구 세종로 세종문화회관 앞 보도

소개
천주교인들이 압송되어 문초를 받던 곳

기억해야 할 인물
‘하느님의 종’ 윤운혜·정철상, 성 이광헌, 성 남명혁

묵상과 기도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그 모든 순간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무한히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읍시다.

형조는 조선시대의 중앙관서인 육조의 하나입니다. ‘추관’ 또는 ‘추조’라고도 했으며, 사헌부 ․ 한성부와 아울러 삼법사라 일컬어지기도 했습니다. 형조는 한성부 서부 적선방에 있었는데,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이후, 많은 천주교인들이 형조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았습니다. 그 시작은 정조가 즉위한 지 9년째 되던 1785년에 발생한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신자들이 명례방에 있던 김범우 토마스의 집에서 집회를 갖던 중, 형조의 금리들에게 발각되어 형조로 압송된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최필공 토마스 ․ 최필제 베드로 ․ 윤운혜 루치아 ․ 정철상 가롤로 등이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고, 김천애 안드레아 ․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 윤지헌 프란치스코 등은 전주에서 서울로 압송되어 신문을 받았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 때에는 이광헌 아우구스티노 ․ 남명혁 다미아노 ․ 김효임 골롬바 ․ 김효주 아네스 ․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 등이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으며,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전장운 요한 ․ 최형 베드로 성인 등도 형조를 거쳐 갔습니다. 형조 터 표시는 5호선 광화문역 세종문화회관에서 세종로공원 정문 쪽 도로 바닥에 매입되어 있습니다.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 성지
위치
중구 의주로 2가 16번지 서소문 공원 내

소개
신유·기해·병인박해 때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신자들이 참수형을 받아 순교한 장소

기억해야 할 인물
성 정하상, 성 남종삼, 성 유진길

묵상과 기도
일상의 크고 작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주 예수님을 생생하게 인식하며 살아가도록 합시다.

서소문은 조선시대 수도 한성의 출입 성문이던 네 개의 도성 대문과 네 개의 소문 가운데 하나인데, 서소문의 정식 이름은 소의문입니다. 서소문 밖의 네거리 광장은 조선시대 공식 사형집행지였는데, 그 광장은 문안에서 아현고개와 남대문 밖 칠패시장으로 통하던 성문 밖에 생겨난 주막거리 광장이었습니다. 이 광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주막과 주위의 시장은 ‘파루인정제’ 때문에 생겨났습니다. 즉 아침에 성문이 열리면 도성 출입이 가능하나, 저녁에는 성문을 닫아 통행을 금지하니, 통행인들이 문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성문 밖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했기에 이들을 상대로, 성문 밖에 취락이 생겨났고, 광장도 생겨났던 것입니다.
따라서 관에서는 중죄인을 사형에 처할 때마다 군중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다수의 군중을 동원하기 쉽고, 또한 사형죄인들이 갇혀 있던 포도청이나 의금부와 가까운 서소문 밖 네거리 광장을 사형 집행 장소로 이용했습니다.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에서 순교자가 처음 생긴 것은 1801년 신유박해 때로, 한국 교회의 첫 세례자인 이승훈 베드로와 명도회 초대 회장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그리고 여회장 강완숙 골룸바와 백서사건으로 유명한 황사영 알렉시오 등이 참수로 순교하였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 때에는 정하상 바오로,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등이 이곳에서 순교하였고,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성 남종삼 요한 등이 순교하였습니다. 이처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는 많은 순교자들이 탄생하였으며, 그중 마흔 네 명이 성인의 반열에 오르면서 한국 교회사상 가장 많은 성인이 탄생한 곳이라는 영예를 얻게 되었습니다.

※ 자세한 성지 내용 보기
중림동 약현 성당
위치
중구 중림동 149-2 (02-362-1891, www.yakhyeon.or.kr)

소개
1892년에 건축된 서울 시내 두 번째 본당

기억해야 할 인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모든 순교자

함께 볼 곳
서소문 순교자 전시관

묵상과 기도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구체적이고 끈기 있게 자비를 베풀 수 있도록 청합시다.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 성지를 관할하는 중림동약현 성당은 1891년 11월 9일 명동 본당에서 분리 설정된 서울 시내 두 번째 본당입니다. 규모는 명동 성당보다 작고, 도성문 밖에 위치하고 있으나, 한국에서 가장 역사가 오랜, 한국 최초의 고딕식 교회 건물로 1892년 11월에 건축 공사를 완료하고, 1893년 4월 23일에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봉헌되었습니다.
한국 최초의 서양식 교회 건물이며 아름다움과 장엄함을 겸비한 성당 건물로서 1977년 11월 22일자로 ‘국가 사적 제252호’에 지정되었습니다. 한편 1998년에 화재로 내부가 불탔으나 2000년에 다시 복원되었습니다.
약현 본당이 설립된 당시에는 서울에 두 개의 본당만이 있었기 때문에 그 관할 구역은 아주 광범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울 도성의 경계였던 사대문을 기준으로 종현 본당은 도성 안을, 약현 본당은 사대문 밖의 전 지역을 관할하였고, 약현 본당은 가깝게는 도성 주변의 서울 지역과 경기도 일대, 멀게는 지금은 북한 지역인 개성을 지나 황해도 배천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을 관할하였습니다.
성당 내에 있는 서소문 순교자 전시관은 1991년 3월에 개관하였다가 지난 2009년에 성당 내 피정 집을 수리하여 재개관하였습니다. 전시실에는 초기 한국 교회천주교회의 4대 박해 당시 순교한 신자들이 사용하던 교리서, 신심서적 등이 있으며, 특히 서소문 순교자인 강완숙의 가계도, 프랑스 선교사들의 문서류도 전시하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미사용 제구, 나무 제대, 약현 성당 목재 종틀, 성당에서 사용하던 오르간, 1998년 성당 화재로 검게 탄 성당 제대와 성모상 등이 전시되어 있고 약현 본당 출신 신부로 만주에서 사목하다 선종한 김선영 신부의 유해와 친필 서한 등도 전시되어 있어 함께 둘러보면 좋을 것입니다.
경기감영 터
위치
종로구 평동 164 서울적십자병원 정문 옆

소개
‘하느님의 종’ 조용삼이 옥중에서 세례를 받고 순교한 곳

기억해야 할 인물
‘하느님의 종’ 조용삼·최필공·최필제

묵상과 기도
복음을 증거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경기감영이 설치된 것은 태종 때의 일이었다. 한양으로 천도한 다음 해인 1395년(태조 4)에 경기 행정편제가 개편되었다. 이때 광주와 수원의 관할인 군현을 갈라서 경기좌도라 하고, 양주․부평․철원․연안의 관할인 군현을 경기 우도로 했습니다. 그 후 1413년에 경기 영역을 다시 한 번 조정하여 좌․우도로 나누지 않고 경기로 확정하면서 도관찰사를 파견하였고, 감영을 수원에 설치하였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뒤에 감영은 경기도 광주로 옮겨졌다가 다시 한성부 내 서대문 밖 반송방으로 이전되었습니다.
숨어서 천주를 믿어야 했던 박해기였지만 점차 확산되어 가던 경기 지역의 신앙 공동체는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최창주 마르첼리노, 이중배 마르티노, 원경도 요한, 권상문 세바스티아노, 홍인 레오 등 체포된 신자들은 경기감영으로 이송되어 혹독한 형벌과 문초를 받았습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순교한 이가 있었는데, 바로 순교자 조용삼입니다. 조용삼은 11개월 동안 옥에 갇혀 있었고, 옥중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대세를 받았습니다. 1801년 2월에 다시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가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형벌을 받았으나 약해진 몸은 더 이상의 형벌을 감당할 수 없었고, 결국에는 다시 옥에 갇힌 지 며칠 만인 3월 27일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형벌 때에 박해자들을 향해 이렇게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하늘에는 두 명의 주인이 없고, 사람에게는 두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천주를 위해 한 번 죽는 것뿐이며, 다른 말씀은 드릴 것이 없습니다.”
경기감영 터 표지석은 종로구 평동 164 서울적십자병원 정문 옆에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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