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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단 도보 성지순례


※ 주제 : 신앙 따라 강물 따라 순교자와 함께
※ 일시 : 2013년 9월 10일(화) 08:30 ~ 17:30(차량이동 40분, 도보 5시간 소요 예정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성당
위치
종로구 혜화동 90-1

소개
최초의 한국인 사제 김대건 신부의 유해가 모셔진 장소이며 한국 교회 사제 성소의 요람

기억해야 할 인물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묵상과 기도
믿음직한 젊은이들을 많이 부르시어 주님의 제자로 삼으시고,
주님의 일꾼으로 삼으소서.

*성소자 양성 공간이므로 개방이 어렵습니다. 기도로 함께해 주시기 바랍니다.
종로구 혜화동 90-1에 위치한 가톨릭대학교 성당에는 최초의 한국인 신부님이신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의 유해가 모셔져 있습니다.
1846년 9월 16일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한 김대건 신부님의 시신은 여러 신자들에 의해 와서(지금의 왜고개)에 안장되었다가 서 야고보, 박 바오로, 한경선, 이민식 등 몇몇 신자들이 다시 미리내로 이장하였습니다. 그 후 1886년 기해, 병오박해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 조사를 할 때 교구 재판 판사인 프와넬 신부가 미리내에 있던 봉분 중앙을 헤치고, 관을 묻은 뒤에 구덩이 위를 덮는 넓은 나무 판인 횡대를 확인하였습니다. 그리고 1901년 5월 21일에는 프와넬 신부와 드망즈 신부, 안성 본당 공베르 신부, 미리내 본당 강도영 신부가 참여한 가운데 유해를 발굴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횡대는 봉분 안에 다시 넣고 원상태로 봉분을 쌓았으며 발굴된 유해는 강도영 신부의 사제관에 안치하였다가 5월 23일에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겨 안치하였습니다. 이후 김대건 신부님의 유해는 6·25전쟁 당시 이재현 신부에 의해 비밀리에 성당 옆 성모상 아래 숨겨지기도 했고, 전쟁이 더욱 심각해지던 1950년 9월 28일에는 경남 밀양으로 피난 가 있던 소신학교로 옮겨 모셔졌다가, 전쟁이 끝난 후 혜화동 소신학교 성당으로 옮겨 안치되었습니다.
그리고 1960년 7월 5일 신축 중이던 성신교정 성당이 완공되자, 유해 가운데서 하악골을 미리내 경당으로, 치아는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으로 분리, 안치시키고 나머지 유해는 성당으로 옮겨와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1994년 2월 성당 수리공사를 할 때 새로 석관묘를 제작하여 옮겼으며, 1901년부터 1994년 2월 24일까지 사용했던 기존의 목관과 대리석판은 학교 내 전례박물관으로 옮겨 소장하고 있습니다.
좌포도청 터
위치
종로3가역 3호선 9번 출구 앞

소개
박해 시기 신앙 선조들의 순교지

함께 볼 곳
‘하느님의 종’ 최인길·윤유일·지황

묵상과 기도
하느님을 내 삶의 첫 자리에 모실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포도청은 원래 도적을 잡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 ․ 운영되었습니다. 그러나 점차 그 담당 업무가 확대되어 한성부민들의 생활 전반에 걸쳐 금지 조항을 위반하는 사건들을 다루었고, 개항기에는 궁문수비 ․ 외국공사관의 경비 ․ 반역죄인에 대한 심문까지도 담당하였습니다. 또한 지방의 중죄인을 압송 ․ 체포하여 조사하고, 그 죄의 경중에 따라 의금부와 형조 등 상급기관으로 이송하는 중간기구로서의 역할도 수행하였습니다. 좌포도청은 정선방 파자교 동편에 설치되었는데, 이 지역은 현재 종로구 묘동 56번지 단성사 일대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좌포도청이 담당한 구역은 서울의 동부 ․ 남부 ․ 중부와 경기 좌도, 즉 강화, 광주, 김포, 수원, 시흥, 안성, 용인, 인천 등지였습니다.
박해시기 수많은 신자들이 좌 ․ 우포도청에서 순교하였으나 기록상 좌 ․ 우포도청이 분명하게 구분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순교자들은 포도청에서 순교했다고만 알려지고 있습니다. 1795년 을묘박해 때는 최인길 마티아, 윤유일 바오로, 지황 사바가 체포되어 좌포도청에서 심한 고문을 당하고 매를 맞다가 1795년 6월 28일에 포도청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좌포도청 표지석은 종로3가역 3호선 9번 출구 앞에 있습니다.
이벽의 집 터―수표교
위치
종로구 청계천로 105 두레시닝 건물 앞

소개
평신도에 의한 자발적인 최초의 신앙 공동체 탄생

기억해야 할 인물
이벽, 이승훈, 정약용, 권일신

묵상과 기도
세례 때의 거룩한 원의를 기억하며 그 신앙의 열정을 새롭게 해주시기를 기도합시다.

북경(北京)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영세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 베드로는 1784년 겨울, 수표교 인근 이벽의 집에서 이벽은 ‘세례자 요한’, 정약용은 ‘사도 요한’, 권일신은 ‘프란치스코 사베리오’라는 세례명으로 첫 세례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이로써 젊은 학자들을 중심으로 평신도에 의한 자발적인 최초의 신앙공동체가 탄생하였습니다.
정약용이 쓴 <여유당전서>에는 당시 이벽의 집이 서울 수표교, 현재의 서울시 중구 수표동 43번지와 종로구 관수동 152번지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그 기록에 근거하여 그 근처 인도에 기념표석을 건립한 것입니다. 보다 확실하게 집 터로 추정되는 곳은 현재 표지석이 있는 곳에서 정면을 바라보고 청계천 건너 지역이지만 상가가 밀집하여 표지석을 세울 장소를 찾기 어려워 현재의 위치에 표지석을 세웠습니다.
종로구 청계천로 105 두레시닝 건물 앞에 서 있는 표지석에는 “한국 천주교회 창립 터 정조 8년(1784년) 겨울, 이 수표교 근처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한국 천주교회가 설립되었다”라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명동 대성당
위치
중구 명동 2가 1 (02-774-1784)

소개
한국 교회 최초의 본당이며 성인 다섯 분과 순교자 네 분의 유해가 모셔진 한국 천주교회의 상징

기억해야 할 인물
성 앵베르 주교, 성 모방·성 샤스탕·푸르티에·프티니콜라 신부, 성 최경환, 성 김성우, 이 에메렌시아, 무명 순교자 1명

함께 볼 곳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역사박물관(명동 대성당 성모동산 뒤) 지하 묘역(지하 소성당 내)

묵상과 기도
자주 고해성사를 보고 진실한 마음으로 성체를 모심으로써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도록 기도합시다.

명동 대성당이 자리하고 있는 명동 일대는 옛날 조선 ‘한성부 남부 명례동(明禮洞)’에 속하던 지역입니다. 지금은 주위 고층빌딩 때문에 잘 보이지 않지만 ‘북달재’라고 불리던 남산 북녘 언덕 위에 세워진 명동 대성당은 도성 내 어느 곳에서나 올려다 보이던, 뾰족탑이 인상적인 서양식 교회 건물로 세인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이 개항정책을 취하게 되면서 교회에 대한 정부의 박해정책에 변화의 조짐이 보이자, 교회 당국은 1882년 4월에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본당으로 종현 본당, 지금의 명동 본당을 설정했습니다. 이후 1882년 7월 26일에 부주교로 임명된 블랑 신부가 신병으로 프랑스 본국으로 돌아가 요양 중이던 리델 주교가 1884년에 선종하면서 조선대목구 제7대 교구장직을 승계하였습니다.
1890년 블랑 주교가 사망한 후 제8대 교구장 주교로 착좌한 뮈텔 주교는 1892년 조선 최초의 서양식 대성당 건축을 착공하게 되었습니다. 공사를 시작하였지만 성당을 짓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공사 현장의 중국인 기능공들이 본국으로 철수하는 바람에 1년 이상이나 공사를 중지할 수밖에 없었고 전쟁 종결 후 공사를 재개하였으나 준공을 앞두고 공사를 감독하던 코스트 신부가 선종하는 등 크고 작은 문제들이 연거푸 발생하였지만 푸아넬 신부가 대신 마지막 공사를 서둘러 1898년 5월 29일에 대성당 축성식을 거행할 수 있었습니다.
명동 대성당의 지하 소성당 묘역은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시기 위해 설계 때부터 계획된 시설로서, 시복 수속 작업의 일환으로 각지에서 발굴된 순교자들의 유해가 1900년부터 이곳으로 옮겨져 안치되었습니다. 현재 명동 지하 성당에는 순교 성인 다섯 분과 순교자 네 분 등 모두 아홉 분의 유해가 모셔져 있습니다. 성 앵베르 주교, 성 모방 신부, 성 샤스탕 신부,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 김성우 안토니오, 순교자 이 에메렌시아, 무명 순교자 1명, 푸르티에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가 모셔져 있어, 기도와 참배를 위해 찾는 순례자들이 많은 성역입니다. 이 가운데 이 에메렌시아는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시복 대상자로 선정되었습니다.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 성지
위치
중구 의주로 2가 16번지 서소문 공원 내

소개
신유·기해·병인박해 때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신자들이 참수형을 받아 순교한 장소

기억해야 할 인물
성 정하상, 성 남종삼, 성 유진길

묵상과 기도
일상의 크고 작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주 예수님을 생생하게 인식하며 살아가도록 합시다.

서소문은 조선시대 수도 한성의 출입 성문이던 네 개의 도성 대문과 네 개의 소문 가운데 하나인데, 서소문의 정식 이름은 소의문입니다. 서소문 밖의 네거리 광장은 조선시대 공식 사형집행지였는데, 그 광장은 문안에서 아현고개와 남대문 밖 칠패시장으로 통하던 성문 밖에 생겨난 주막거리 광장이었습니다. 이 광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주막과 주위의 시장은 ‘파루인정제’ 때문에 생겨났습니다. 즉 아침에 성문이 열리면 도성 출입이 가능하나, 저녁에는 성문을 닫아 통행을 금지하니, 통행인들이 문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성문 밖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했기에 이들을 상대로, 성문 밖에 취락이 생겨났고, 광장도 생겨났던 것입니다.
따라서 관에서는 중죄인을 사형에 처할 때마다 군중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다수의 군중을 동원하기 쉽고, 또한 사형죄인들이 갇혀 있던 포도청이나 의금부와 가까운 서소문 밖 네거리 광장을 사형 집행 장소로 이용했습니다.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에서 순교자가 처음 생긴 것은 1801년 신유박해 때로, 한국 교회의 첫 세례자인 이승훈 베드로와 명도회 초대 회장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그리고 여회장 강완숙 골룸바와 백서사건으로 유명한 황사영 알렉시오 등이 참수로 순교하였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 때에는 정하상 바오로,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등이 이곳에서 순교하였고,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성 남종삼 요한 등이 순교하였습니다. 이처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는 많은 순교자들이 탄생하였으며, 그중 마흔 네 명이 성인의 반열에 오르면서 한국 교회사상 가장 많은 성인이 탄생한 곳이라는 영예를 얻게 되었습니다.
당고개 순교성지
위치
용산구 신계동 1-57 (02-711-0933, http://www.danggogae.org

소개
기해박해 때 10명의 신자들이 참수로 순교한 장소

기억해야 할 인물
성 이인덕·홍영주·권진이·이문우·박종원·손소벽·최영이·이경이·홍병주와 ‘하느님의 종’ 이성례

묵상과 기도
신앙이 가정생활의 중심이 되도록 가족 간에 먼저 복음의 말씀을 실천할 수 있게 기도합시다.

당고개 순교성지는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많은 순교성인을 배출한 순교성지입니다. 용산구 원효로 2가에 위치하고 있으며 예날 민간인들이 제사 지내는 당집이 있었기에 당고개라 불렸으며 기해박해가 끝나갈 무렵에 열 명의 교우들이 순교한 곳입니다.
1839년 음력 섣달그믐 경, 1년간에 걸친 기해박해의 마지막 단계에 아직 남아 있던 천주교인 다수를 서소문 밖 네거리 광장에서 처형하기로 결정했으나, 이런 사실을 사전에 알게 된 서소문 근처의 상인들이 설 대목장을 봐야 하는데, 사람들의 목을 베는 잔인한 처형이 이루어져서는 곤란하다며 설 대목장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처형장소를 서소문 밖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서소문에서 남동쪽으로 내려가 한강변에 위치한 용산의 당고개에서 처형하도록 하였습니다. 가족을 한 날에 처형하지 않는다는 국법에 따라 열 분 가운데 일곱 명은 12월 27일에, 세 명은 28일에 처형되었습니다. 현재 그 가운데 아홉 분은 성인이 되셨고, 이성례 마리아는 ‘하느님의 종’에 올라 있습니다.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는 어린 다섯 형제를 두고 남편 성인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같이 수리산 교우촌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연행되어 옥고를 치르면서 젖먹이 막내아들이 자신 옆에서 배고파 죽는 것을 보아야 하는 처절하고도 기막힌 시련과 옥 밖의 네 명의 어린 자식들에 대한 인간적인 정에 못 이겨 한때나마 주님께 등을 돌렸지만, 다시 회개하고 옥에 돌아와 갖은 악형과 유혹을 이겨내고서 순교하였습니다.
새남터 순교성지
위치
용산구 이촌2동 199-1 (02-716-1769, http://www.saenamteo.or.kr)

소개
기해·병오·병인박해 당시 성직자 11명과 교회지도자 3명이 군문효수형을 받아 순교한 장소

기억해야 할 인물
성 앵베르 주교·베르뇌 주교, 성 모방·샤스탕·도리·브르트니에르·볼리외· 김대건 신부와 프티니콜라·푸르티에 신부, 성 현석문·우세영·정의배와‘하느님의 종’ 주문모 신부

묵상과 기도
매 순간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랑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새남터는 원효로 남부와 한강로 서편 사이와, 남으로는 한강변까지의 황량한 모래터였습니다. 남대문 밖 저습지였던 모래벌 새남터는, 간혹 풀이 우거져 있기는 하나 사람이 거주하거나 농토를 일굴 수 없는 모래토 황무지였습니다. 조선시대 초기부터 그 북부 일부를 군사 훈련장으로 사용해 왔으며, 때로는 군문효수형을 선고받은 국사범을 비롯한 중죄인의 처형장으로 이용되기도 했습니다.
새남터와 조선 천주교회와의 악연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성직자 없이 천주 신앙공동체 조직을 이루고 천주 신앙생활을 시작한 조선 천주교인들의 성직자영입운동에 따라 선교활동을 펴고 있던 조선 교회 최초의 신부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박해 당국에 의해 새남터에서 처형됨으로써 비롯되었습니다.
그 후 한강가, 쓸쓸하고 황막한 모래땅 새남터는 우리 교회에 큰 박해가 닥칠 때마다 외국인 주교나 신부 등 선교사와 우리 신자 다수가 참수 치명된 대표적 순교성지가 되었고 새남터에서 순교한 순교자들 가운데 11위가 1984년 5월에 시성되어 103위 성인 반열에 올랐습니다.
절두산 순교성지
위치
마포구 합정동 96-1 (02-3142-4434, www.jeoldusan.or.kr)

소개
1866년 프랑스 함대의 침입을 계기로 많은 신자들을 참수해 처형했던 장소

기억해야 할 인물
이붕익, 김이쁜, 이의송 등 절두산 순교자

함께 볼 곳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매주 월요일 휴관)

묵상과 기도
우리가 가난한 사람을 위로할 때 우리 주님을 위로해 드리는 것입니다.

한강의 버들꽃나루라고 불렸던 양화진에 자리 잡은 절두산 순교성지는 1956년부터 본격적으로 조성된 한국 천주교회의 대표적인 순교 사적지로서, 가장 혹독한 박해로 일컬어지는 1866부터 1873까지인 병인박해 기간 동안 수많은 신자들이 이곳에서 처형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기록으로 확인되는 순교자는 김한여 베드로, 최경원 야고보, 이의송 프란치스코, 김이쁜 마리아, 이붕익 베드로, 조 타대오 등 17명과 이름을 알 수 없는 순교자 5명을 포함하여 22명뿐입니다.
현재 병인순교 100주년 기념 성당과 박물관이 서 있는 봉우리는 그 형상이 누에머리 모양을 닮았다고 하여 잠두봉이라 불렸으나, 수많은 신자들이 이곳에서 처형된 후에 ‘천주교인들이 목 잘려 죽은 곳’이라는 의미의 절두산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현재 성지 내에 있는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에는 순교자들의 유품과 유물이 보존되어 있는 것은 물론, 한국 천주교회의 변화와 발전을 한눈에 보여 주는 교회 유물도 다수 전시 보관되고 있습니다. 특히 성지는 한국 교회사뿐만 아니라, 한국사에 있어서도 근대와 개화기를 아우르는 역사적인 장소이기에, 지난 1997년 11월에 국가 사적 제39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오늘날 절두산 순교성지는 순교 성인들을 공경하는 교회 정신을 따르려는 신자들의 뜨거운 신앙심 덕분에 한국의 성지로서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성지로서 자리매김하였고, 순교자들의 전구를 통한 기도의 은총을 체험하려는 국내외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