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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단 도보 성지순례
절두산 순교성지
위치
마포구 합정동 96-1 (02-3142-4434, www.jeoldusan.or.kr)

소개
1866년 프랑스 함대의 침입을 계기로 많은 신자들을 참수해 처형했던 장소

기억해야 할 인물
이붕익, 김이쁜, 이의송 등 절두산 순교자

함께 볼 곳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매주 월요일 휴관)

묵상과 기도
우리가 가난한 사람을 위로할 때 우리 주님을 위로해 드리는 것입니다.

한강의 버들꽃나루라고 불렸던 양화진에 자리 잡은 절두산 순교성지는 1956년부터 본격적으로 조성된 한국 천주교회의 대표적인 순교 사적지로서, 가장 혹독한 박해로 일컬어지는 1866부터 1873까지인 병인박해 기간 동안 수많은 신자들이 이곳에서 처형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기록으로 확인되는 순교자는 김한여 베드로, 최경원 야고보, 이의송 프란치스코, 김이쁜 마리아, 이붕익 베드로, 조 타대오 등 17명과 이름을 알 수 없는 순교자 5명을 포함하여 22명뿐입니다.
현재 병인순교 100주년 기념 성당과 박물관이 서 있는 봉우리는 그 형상이 누에머리 모양을 닮았다고 하여 잠두봉이라 불렸으나, 수많은 신자들이 이곳에서 처형된 후에 ‘천주교인들이 목 잘려 죽은 곳’이라는 의미의 절두산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현재 성지 내에 있는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에는 순교자들의 유품과 유물이 보존되어 있는 것은 물론, 한국 천주교회의 변화와 발전을 한눈에 보여 주는 교회 유물도 다수 전시 보관되고 있습니다. 특히 성지는 한국 교회사뿐만 아니라, 한국사에 있어서도 근대와 개화기를 아우르는 역사적인 장소이기에, 지난 1997년 11월에 국가 사적 제39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오늘날 절두산 순교성지는 순교 성인들을 공경하는 교회 정신을 따르려는 신자들의 뜨거운 신앙심 덕분에 한국의 성지로서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성지로서 자리매김하였고, 순교자들의 전구를 통한 기도의 은총을 체험하려는 국내외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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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고산 성지
위치
마포구 백범로 35(신수동) 서강대학교 가브리엘관 앞

소개
기해박해 때 앵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신부가 새남터에서 순교한 후 이곳에 4년간 묻혀 있던 장소

기억해야 할 인물
성 앵베르 주교, 성 모방 신부, 성 샤스탕 신부

묵상과 기도
젊은이들이 자신의 영혼과 육신을 투명하게 지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노고산은 박해시대 여러 처형장과 가까운 이유로 많은 순교자의 시신이 매장되었던 곳입니다. 현재 노고산 아래 순교자들이 묻혔던 땅 위에는 예수회의 서강대학교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 그리고 샤스탕 신부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후 노고산에 4년 동안 묻혀 있다가 삼성산으로 이장되었고, 지금은 명동 대성당 지하소성당 묘역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이들 세 성인은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지난 2010년 서강대학교에서는 가브리엘관 앞 소나무밭에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등 세 성인을 기리는 ‘순교 현양비’를 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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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신학교 성당
위치
용산구 원효로4가 성심여자고등학교 내

소개
코스트 신부가 설계한 신학교 성당으로 김대건 신부 등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셨던 장소

기억해야 할 인물
김대건 신부와 한국 교회의 모든 사제들

함께 볼 곳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교사

묵상과 기도
순교 성인들에게 물려받은 신앙의 유산을 후대에도 전할 수 있도록 생활해야 합니다.

✽순례 가능 시간 : 오전 9시~오후 5시 (평일 및 주일 포함 / 공휴일은 전화 문의 요망)

용산의 예수 성심신학교 성당은 1887년 3월 부엉골 신학교가 용산으로 옮겨 개교한 이후인 1902년 4월 14일에 성당 봉헌식을 가졌습니다. 당시 조선 대목구장 뮈텔 주교는 신학교 부속 성당 건립을 위해 국내외에서 후원자를 구하던 중 프랑스인 드 사라(de Sarah) 여사로부터 기부하겠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성당 건립 기금 후원에 앞서 한국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순교지에 성당을 건립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웠습니다. 이에 뮈텔 주교는 김 신부의 순교지인 새남터는 홍수로 자주 잠기는 위치에 있어 위험하고, 오히려 조선대목구에서 유일한 신학교인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 순교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는 점, 그리고 김대건 신부의 뒤를 계승하고자 하는 조선의 신학생들이 공부하는 곳에 신학교 성당을 건립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점을 오랜 기간 설득하여 마침내 그녀의 동의를 얻어냈습니다. 그리하여 1899년 6월 9일에 성당 기공식을 가졌고 3년 동안의 공사 기간을 거쳐 신학교 성당인 “성모 성심 성당”을 완공하였습니다.
한편 뮈텔 주교는 후원자의 뜻을 기리기 위해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미리내에서 이장하여 모시기로 결정하였고, 1901년 5월 21일에 시복 재판 판사인 프와넬) 신부와 기록 서기인 드망즈 신부, 안성 본당의 공베르 신부와 미리내 본당의 강도영 신부, 그리고 신자 30여 명이 참관한 가운데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발굴하였습니다. 발굴된 유해는 강도영 신부 사제관에 안치하였다가 5월 23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겨 안치하였으며, 성당이 완공된 이후인 1902년 6월 23일에 성당 내 제의방에서 제대로 들어서는 오른 편 모퉁이 바닥을 파고 그 안에 유해를 안치하였습니다. 이때 순교자임을 상징하는 ‘빨마가지와 1821~1846 A.K’라고 새긴 대리석 판을 덮어 봉인하였습니다. 한편 성당 출입구 상부에는 나무로 만든 명문을 부착하였는데 거기에는 성당 착공일인 1869년 6월 9일과 성당 봉헌일인 1902년 4월 14일, 그리고 김대건 신부의 세례명 안드레아(Andrea)의 이니셜인 ‘A’, 성 김(Kim)의 이니셜인 ‘K’와 생몰연대(1821~1846)가 로마자로 새겨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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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고개 순교성지
위치
용산구 신계동 1-57 (02-711-0933, http://www.danggogae.org

소개
기해박해 때 10명의 신자들이 참수로 순교한 장소

기억해야 할 인물
성 이인덕·홍영주·권진이·이문우·박종원·손소벽·최영이·이경이·홍병주와 ‘하느님의 종’ 이성례

묵상과 기도
신앙이 가정생활의 중심이 되도록 가족 간에 먼저 복음의 말씀을 실천할 수 있게 기도합시다.

당고개 순교성지는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많은 순교성인을 배출한 순교성지입니다. 용산구 원효로 2가에 위치하고 있으며 예날 민간인들이 제사 지내는 당집이 있었기에 당고개라 불렸으며 기해박해가 끝나갈 무렵에 열 명의 교우들이 순교한 곳입니다.
1839년 음력 섣달그믐 경, 1년간에 걸친 기해박해의 마지막 단계에 아직 남아 있던 천주교인 다수를 서소문 밖 네거리 광장에서 처형하기로 결정했으나, 이런 사실을 사전에 알게 된 서소문 근처의 상인들이 설 대목장을 봐야 하는데, 사람들의 목을 베는 잔인한 처형이 이루어져서는 곤란하다며 설 대목장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처형장소를 서소문 밖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서소문에서 남동쪽으로 내려가 한강변에 위치한 용산의 당고개에서 처형하도록 하였습니다. 가족을 한 날에 처형하지 않는다는 국법에 따라 열 분 가운데 일곱 명은 12월 27일에, 세 명은 28일에 처형되었습니다. 현재 그 가운데 아홉 분은 성인이 되셨고, 이성례 마리아는 ‘하느님의 종’에 올라 있습니다.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는 어린 다섯 형제를 두고 남편 성인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같이 수리산 교우촌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연행되어 옥고를 치르면서 젖먹이 막내아들이 자신 옆에서 배고파 죽는 것을 보아야 하는 처절하고도 기막힌 시련과 옥 밖의 네 명의 어린 자식들에 대한 인간적인 정에 못 이겨 한때나마 주님께 등을 돌렸지만, 다시 회개하고 옥에 돌아와 갖은 악형과 유혹을 이겨내고서 순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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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고개 성지
위치
용산구 용산동 5가 2-65번지 (02-798-2457)

소개
기해·병오·병인박해 당시 새남터 순교자들이 잠시 매장된 장소

기억해야 할 인물
성 베르뇌 주교, 성 김대건 신부, 성 남종삼, 성 최형

묵상과 기도
평신도 순교자들의 영혼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 미사를 봉헌합시다.

왜고개는 현재 군종교구 주교좌인 국군 중앙 성당이 자리하고 있는 곳으로 1839년 기해박해 때 군문효수의 형을 받고 순교한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 그리고 1886년 병인박해 때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성 남종삼 요한, 성 최형 베드로 그리고 홍봉주 토마스 등이 얼마간 암매장되었던 곳입니다.
왜고개는 한자로 와현 또는 와서현으로 불리던 곳으로 원래 옛날부터 기와와 벽돌을 구워 공급하던 와서가 있었던 데서 그 이름이 유래하였으며, 서울 명동 성당과 중림동약현 성당을 지을 때 사용했던 벽돌도 이곳에서 공급해 주었다고 전해집니다.
왜고개는 병인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일곱 명의 순교자가 33년간,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두 명의 순교자가 43년간 매장되었던 유서 깊은 교회의 사적지입니다. 또한 1846년 9월 16일 병오박해 때 순교한 한국인 첫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시신이 잠시 모셔졌다가 박해가 진정된 후 미리내로 이장된 역사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역사를 통해 왜고개는 모두 열 명의 순교자가 묻혔던 곳으로 그중 여덟 명이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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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남터 순교성지
위치
용산구 이촌2동 199-1 (02-716-1769, http://www.saenamteo.or.kr)

소개
기해·병오·병인박해 당시 성직자 11명과 교회지도자 3명이 군문효수형을 받아 순교한 장소

기억해야 할 인물
성 앵베르 주교·베르뇌 주교, 성 모방·샤스탕·도리·브르트니에르·볼리외· 김대건 신부와 프티니콜라·푸르티에 신부, 성 현석문·우세영·정의배와‘하느님의 종’ 주문모 신부

묵상과 기도
매 순간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랑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새남터는 원효로 남부와 한강로 서편 사이와, 남으로는 한강변까지의 황량한 모래터였습니다. 남대문 밖 저습지였던 모래벌 새남터는, 간혹 풀이 우거져 있기는 하나 사람이 거주하거나 농토를 일굴 수 없는 모래토 황무지였습니다. 조선시대 초기부터 그 북부 일부를 군사 훈련장으로 사용해 왔으며, 때로는 군문효수형을 선고받은 국사범을 비롯한 중죄인의 처형장으로 이용되기도 했습니다.
새남터와 조선 천주교회와의 악연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성직자 없이 천주 신앙공동체 조직을 이루고 천주 신앙생활을 시작한 조선 천주교인들의 성직자영입운동에 따라 선교활동을 펴고 있던 조선 교회 최초의 신부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박해 당국에 의해 새남터에서 처형됨으로써 비롯되었습니다.
그 후 한강가, 쓸쓸하고 황막한 모래땅 새남터는 우리 교회에 큰 박해가 닥칠 때마다 외국인 주교나 신부 등 선교사와 우리 신자 다수가 참수 치명된 대표적 순교성지가 되었고 새남터에서 순교한 순교자들 가운데 11위가 1984년 5월에 시성되어 103위 성인 반열에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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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터
위치
영등포구 여의도동 2 여의도공원 잔디마당 세종대왕상 좌측 언덕

소개
1984년 5월 6일에 열린 103위 한국 성인 시성식

기억해야 할 인물
한국의 103위 성인과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묵상과 기도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먹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입니다. 그러니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 줄만큼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한국 교회는 1984년 5월 6일 여의도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집전으로 하느님의 자비와 순교자들의 믿음을 기리는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신앙대회와 103위 순교복자 시성식”을 거행했습니다.
한국 교회 순교복자 김대건 안드레아와 정하상 바오로 및 동료 101위를 성인의 반열에 올리고 전 교회에서 그들을 경건히 공경해야 함을 선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역사적인 시성 선언의 순간은 이 땅에 103위 성인이 탄생하는 은총의 때였던 것입니다. 더욱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친히 한국 교회를 찾아와 103명의 복자를 성인의 반열에 올림으로써 한국 교회에 새로운 빛과 평가를 부여했습니다.
시성된 한국 성인 중에는 10명의 외국인 선교사가 포함되어 있는데 그들의 사랑과 선교 열의는 국적과 신분을 달리하는 사람들을 일치시켜 영광에 빛나는 성스러운 공동체를 탄생시켰습니다.
서울대교구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에서는 2009년 9월 19일,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25주년 기념행사 때, 과거 시성식이 거행되었던 제단자리인 여의도공원 잔디마당에 기념 표석을 세워 그분들의 모범을 따르며, 온 민족과 누리에 그들의 신앙이 이 민족의 희망의 표징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기념표석” 전면에는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터”라는 제목 아래 “이 땅에 빛을! 한국의 103위 순교자를 성인 반열에 올리노니, 세계 교회가 공경하기를 바랍니다.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라는 시성선언문 일부를 새겨 넣었습니다. 그리고 표석 후면에는 시성 선포의 역사적인 사실을 명기하기 위해 “우리나라를 처음으로 방문하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1984년 5월 6일 이곳에서 103위 한국 순교복자들을 성인 반열에 올려 이를 온 세상에 선포하신 것을 기리고자 이 돌을 세웁니다. 2009년 9월 19일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추기경 니콜라오 정진석”이라는 문구를 한글, 불어, 영어로 각각 새겨 순례자들에게 기념지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습니.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기념표석은 여의도 공원 세종대왕상 좌측 언덕에 있습니다.
삼성산 성지
위치
관악구 신림동 산 57-1

소개
기해박해 순교자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의 묘소

기억해야 할 인물
성 앵베르 주교, 성 샤스탕 신부, 성 모방 신부

묵상과 기도
순교하신 성직자와 수도자의 영혼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 미사를 봉헌합시다.

삼성산 성지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 앵베르 주교를 비롯하여 성 모방 신부와 성 샤스탕 신부의 유해가 1901년 명동 대성당 지하 소성당 묘역으로 모셔질 때까지 묻혀 있던 곳입니다.
본래부터 삼성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이곳은 세 분의 순교성인의 유해가 발굴되면서 알려지게 되었으며, 1970년 사적지로 조성되었으니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닌 듯합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고 세 명의 외국인 사제는 새남터에서 희광이의 칼끝에 죽음을 맞이했고 이들의 시체는 사흘 동안 버려져 있다가 한강변 모래톱에 묻혔습니다. 신자들은 이들 유해를 거두고자 여러 차례 애를 썼고 마침내 박 바오로 등 여러 명의 교우들이 감시의 눈을 피해 죽음을 무릅쓰고 시신을 수습해 노고산에 임시로 매장했습니다. 그리고 4년 후 박 바오로 등이 가문의 선산인 관악산 줄기 삼성산으로 이장했습니다. 박 바오로는 이 사실을 아들인 박순집에게 알려 주고 그 자신도 일가들과 함께 병인박해 때 순교했습니다.
1886년경에 시복 판사를 맡았던 푸아넬 신부가 이 무덤을 확인하였고 1901년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가 지켜보는 가운데 유해가 발굴되어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겨졌으며, 같은 해 11월 다시 명동 지하 소성당 묘역으로 옮겨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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